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문단 편집) ==== 엇갈린 운명 :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 똑같이 탄핵을 주도했지만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은 너무나 판이했다. 한나라당은 121석으로 제1야당의 위치를 굳건히 하며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기사회생한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민주노동당한테까지 밀리며 아예 존재감조차 희미한 '''의석 9석의 제3야당, 군소정당'''으로 몰락했다. 이러한 상반된 결과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영남, 장년층 기반의 한나라당과 호남, 청년층 기반의 새천년민주당 두 당의 운명을 결정지은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탄핵 후 3월 말엽까지는 한나라당도 영남, 장년층이라는 지지층이 개박살나긴 마찬가지였으나 본격적으로 총선정국으로 전환되면서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인해 '''지지층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나라당이 처음 탄핵안을 통과시키면서 기대한 지지층의 대대적 결집과는 거리가 안드로메다만큼은 있었지만 의석수 50~60석 내외의 정당으로 몰락할 뻔한 상황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때문에 열린우리당에게 절반이나 뺏길 우려까지 나오던 [[TK#s-1.1|TK]] 의석을 무소속에게 1석 내준 걸 제외하면 모두 사수해냈고, [[PK(동음이의어)#s-4|PK]]에서도 부산 1석, 경남 3석, 울산 3석만을 다른 정당에게 내주며 선전했다. 부산의 1석은 무소속 [[박종웅]] 후보 덕분에 한나라당 표가 분산된 탓이 컸고,[* 이렇게 해서 당선된 인물이 이후 이 지역구(사하구)에서 현재까지 5선을 내리 하고 있는 [[조경태]] 의원이다. 이후 20대에선 보수정당으로 넘어가면서 이 지역구는 보수정당으로 환원됐다.] 경남의 3석 중 2석은 [[김해시]]로, 노 대통령의 [[고향]] 버프를 꽤 받았다.[* 당시 김해는 경남의 정당비례득표에서 유일하게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앞선 곳이었다. 이후 김해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탈환했으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갑 지역구를 뺏겼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을 지역구마저 뺏기면서 민주당 낙동강 벨트의 희망이 된다. 게다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민주당에 65%의 지지를 보내는 등 완전히 민주당 텃밭화된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도 갑과 을 모두 민주당 승리.] 남은 1석은 창원의 [[성산구]]였는데, 이 지역은 출마한 후보가 민노당 권영길 후보로 지난 대선 때 꽤 화제를 모으며 전국구 네임드가 된 덕이 컸다.[* 이후 [[노회찬]]과 [[여영국]]이 이를 물려받았으나, 21대 영남에서의 보수정당 결집과 민주당의 표가르기로 다시 보수정당이 탈환한다.] 울산의 3석 중에서도 1석은 88년 이래 지역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정몽준 후보였으니 울산에서 잃은 의석은 실질적으로는 2석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동영의 막말 파문 이후 영남과 강남3구 등 보수 강세 지역들의 장노년층 표가 대대적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원래부터 보수 강세지역에 속하는 통영시·고성군, 밀양시·창녕군, 의령군·함안군·합천군에서도 열린우리당 후보가 40%를 얻었다는 걸 생각하면, 영남권에서도 간신히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대경권]]에서는 30%를 넘는 곳이 [[고령군·성주군·칠곡군]], [[구미시 을]], 영주시, [[포항시 남구·울릉군]] 밖에 없었던 반면, 부경권은 마산시 갑(現 [[창원시 마산합포구(선거구)|창원시 마산합포구]])나, 진해구, 울산광역시 동구를 제외하면, 열린우리당 혹은 민주노동당 후보가 기본으로 30% 넘게 받았다.], 소선거구제의 특성과 영남(68석), 특히 부산경남의 의석수(41석)를 생각해 보면, 사실상 기사회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새천년민주당은 최대 지지기반인 호남을 송두리채 빼앗겼다. [[전라북도]]와 [[광주광역시]]에서는 '''단 1석도 건지지 못했고''', [[전라남도]] 13석 중에서도 5석에 그치는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 전남은 김대중의 영향력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영남을 지켜 기본적인 의석을 바탕에 깔았던 한나라당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호남 외 지역구에서는 단 1석도 못 얻었다. 탄핵 역풍으로 인해 비호남 지역의 민주당계 지지자들이 대부분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호남 다음가는 민주당이 약간 우세한 지역인 서울의 결과만 봐도 처참했다.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대부분의 후보들이 선거비 반액 보전의 기준인 10%에도 못미치는 한 자리수 득표에 그쳤다. 지역 [[구청장]]까지 역임한 용산 선거구 [[성장현]] 후보가 8%대 득표에 그쳤을 정도다. 그나마 예전부터 지역구 관리를 열심히 했거나 이름이 높았던 몇몇 후보들이 선전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추미애]][* 출생은 대구시 내당1동에서 했다.]([[광진구 을]], 30.08%) 말고는 30%대 득표자도 없으며, 20%대로 기준을 낮춰도 [[함승희]]([[노원구 갑]], 26.72%), [[김민석(정치인)|김민석]]([[영등포구 갑]], 20.88%), [[김성순]](송파구 병, 25.14%) 3명이 전부였다. 2. [[김길수|박근혜로 대동단결]] 한나라당, 옥새파동 분열의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의 경우 그래도 비교적 조기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물론 6차 전당대회는 탄핵과 별개로 [[최병렬]] 대표의 사퇴로 인해 3월 18일에 치러지기로 예고되어 있었지만, 탄핵으로 인해 이 전당대회는 그야말로 당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전당대회는 5일 뒤로 연기되어 23일에 치러졌는데, 여기서 한나라당은 당 원내총무로서 탄핵에 앞장섰던 [[홍사덕]] 말고 지도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박근혜]]를 당 대표에 취임시킨다. 이 선택은 사실상 국민들에게 탄핵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천막당사, 반성하는 CF 등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총선에서 단일대오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새천년민주당은 탄핵 이전부터 지속된 당내 갈등이 계속되어 [[막장]]으로 가고 있었다. 신당파가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으로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도, 민주당은 동교동 중심의 구주류와 추미애 중심의 개혁파가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었다. 탄핵 이후 이 갈등은 더더욱 심각해져서 '''[[당대표]] [[조순형]]의 공천장과 선거대책위원장 추미애의 공천장이 같이 선관위에 제출'''되는 개막장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개혁파에 속한 당직자가 몰래 당 직인을 빼돌려서 추미애 측에 건네줘 이뤄진 사건으로 구 주류는 기겁하여 허겁지겁 새로운 직인을 만들고 직인변경신청서를 선관위에 제출해 기존 직인과, 이 직인이 찍힌 [[추미애]]측의 공천장을 무력화시켰다. [* 참고로 [[김무성]]의 [[옥새런]] 이후에 치른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완패했다. 그나마 텃밭인 영남권에서는 새누리당이 우세하긴 했지만, 그것도 대구에서 2석, 부울경에서는 무려 10석을 빼앗겼다.] 이런 상황에서 당대표 조순형은 느닷없이 '''지역감정을 타파'''하겠다며 [[대구광역시]]에 출마해버린다. 당을 선거대책위원장인 [[추미애]]에게 맡기고 본인은 사실상 도망가버린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선거를 치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덕분에 추미애는 당을 살리겠답시고 선거운동 기간 동안 광주에서 사죄의 3보1배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당시엔 차라리 그 시간에 본인 [[선거구]]에서 유세를 했으면 본인은 생존하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있었다. 여담으로, [[추미애]] 의원은 노 대통령 탄핵안에 찬성한게 자신의 정치 인생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이었다고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다만, [[추미애]]의원은 적극적인 탄핵 찬성파는 아니었고 당론에 휩쓸려버린것에 가까웠으며 퇴근 도중 만난 기자들에게 탄핵 반대를 암묵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